서울돈화문국악당 공동기획 <원나경 pre-산조 엮·역>
전통악기 연주자에게 ‘산조’는 큰 산과 같을 것이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보고 싶은 산, 같은 길로 올라도 다른 길로 올라도, 오를 때 마다 새로움을 주는 산이다. 연주자들은 산조를 경외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극복하려 하고 좌절하면서도, 산조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 여정을 만들어 간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산조의 ‘보존’과 ‘전승’ 측면이 다소 강조되었던 데 비해 21세기에 기성 연주자들뿐 아니라 젊은 연주자들도 산조 창작의 대열에 합세하면서 양적 확대와 더불어 산조의 생명력을 증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에 서울돈화문국악당은 2021년부터 매년 선보이는 기획공연 <산조대전> 시리즈에서, 계통을 이루며 전승되고 있는 산조 뿐 아니라 지금 새롭게 만들어진 산조까지 두루 선보이고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가야금·거문고·대금·아쟁 등의 악기로 새롭게 만들어진 산조뿐만 아니라, 기존에 산조를 연주하지 않았던 생황·훈·퉁소·소금 등의 악기로 만든 산조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산조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연주자들이 산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가 산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해금은 연주자가 직접 만들어서 연주하는 새로운 산조를 만나볼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선지우가 연주한 ‘김용성류 해금산조’가 있지만 연주자가 직접 만든 산조는 아니었다-이를 달랠 수 있는 연주회가 8월 24일 ‘pre-산조 <엮·역>’(이하 <엮·역>)이었다. 서울돈화문국악당과 공동기획으로 만든 <엮·역>에서 해금 연주자 원나경은 서도, 경기, 남도지방의 노래들을 해금으로 연주하도록 ‘바꾸고(역/易)’ 이를 ‘엮어(엮)’ 자신이 직접 만든 산조를 선보였다. 그런 그는 산조의 근본과 출발을 ‘소박한 노래에 담긴 삶의 이야기’로 정의하고 있는 듯 했다.
첫 번째 곡 <긴아리, 자진아리>는 평안도 지방의 ‘일 노래’를 해금 독주로 연주한 것이다. 논밭의 김을 맬 때, 나무를 하거나 조개를 캘 때, 놀이를 할 때 두루 불렀던 노래를 해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서도지방 민요의 유들유들하고 요염한 성음을 노래 그대로 매끄럽게 구현하고자 애 쓴 흔적이 역력했다.
두 번째 곡 <Borderline>은 경기지방 민요 <창부타령>을 해금과 가야금의 2중주로 꾸몄다. 창부타령은 본래 굿판에서 연행되던 노래였던 만큼 민요적 성격보다 굿판의 즉흥성과 황홀경(Ecstasy)을 드러내고자 한다. 굿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의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염원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굿 노래는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가야금과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 선율들에서는 시나위의 즉흥성을 넘어선 원초적인 에너지가 꿈틀거렸고,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부분에서는 절대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교감과 합치를 상상할 수도 있었다.
세 번째 곡 <화초사거리>는 남도잡가 <화초사거리>를, 다섯 번째 곡인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는 <육자배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모두 남도지방의 대표적인 노래다. 남도지방의 음계는 흔히 절절한 슬픔의 ‘계면조’로 대표되고 여러 산조에서 많이 활용된다. 그러나 원나경이 주목한 두 곡의 남도잡가는 계면조의 정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남도지방 음계의 다양한 매력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다. <화초사거리>와 <육자배기>에서 원나경이 참고로 삼은 영남지방 예인들의 옛 음원들은 잘 다듬어진 현재의 노래보다 더욱 다양한 음계 활용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여러 악기와 노래가 함께 연주한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를 구성함에 있어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다양한 노랫말들에서 적당한 것을 직접 고르고 이에 어울리는 선율을 옛 명인들의 소리를 참고하여 새롭게 붙여나가는 작업은 바로 우리의 전통적 음악 작법, 음악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전해져 오는 것들의 내면화와 이야기의 전달력을 위한 재구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가볍게 여겨선 안 될 ‘우리 음악 만들기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와 체화 과정이 버무려진 것이 바로 네 번째로 연주한 <원나경 해금산조>였다. 경기·서도·남도의 노래 선율들이 제각각의 목소리로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는데, 이는 마치 한반도 곳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한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진양조에서는 해금의 안줄과 바깥줄을 활용한 음색 차이를 표현한 점이 흥미로웠다. 해금이 흔히 자잘한 농현과 시김새, 재잘대듯 현란한 기교를 특장점으로 삼는 악기로 인식되는데 비해, 한 음 한 음에 집중하는 음색의 차이를 통해 해금의 깊은 맛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진모리와 후반부의 빠른 선율에서도 기존 산조의 ‘속주(速奏)’와 차별되는 여유 있는 활대질의 ‘노래’도 들을 수 있어 그가 지닌 노래에 대한 존중심도 읽을 수 있었다.
근원으로부터, 그리고 천천히
‘산조는 삶을 담는다’고 한다. 또한 산조는 연주자의 삶을 ‘닮기도’ 할 것이다. 원나경은 2021년에 21세기에 산조를 만든 연주자들을 인터뷰하는 작업을 했다. 성급하게 자신의 산조에 다가서기 전에 다양한 연주자들의 산조와 삶을 만나며 생각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런 뒤에 그는 그동안 천착해온 ‘민요’에서부터 산조를 시작했다. 이미 자신이 배우고 익힌 ‘산조’에서 출발하지 않고 출발점을 더 뒤로 더 멀리 옮긴 것이다. 그는 그러한 ‘근원’과 ‘천천히’의 힘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민요의 가사를 곱씹고 바꿔보고, 노래를 흉내 내고 해금으로 바꿔보고, 다른 악기와 합주하면서 서로의 선율을 바꿔보는, 그 느리고 집요한 과정 속에서 그는 빠르지는 않지만 힘 있는 걸음을 걷게 될 것이다. 소박한 노래에서 출발하여 담대한 걸음으로 완성되어가는 원나경의 깊은 발자국이 서울돈화문국악당에 선명하게 남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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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