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의 세력으로 변한 조선인 경성”. 1924년 6월 1일 발간된 <개벽> 제48호에 중간인이라는 필명의 기자가 쓴 기사의 제목이다. 본문은 친절하게 여기서 나오는 외인은 방금 경성의 주인이 된 일본인이라고 덧붙여줬다. 그러면서 세세한 통계를 들어가면서 북촌에 사는 조선인과 남촌에 사는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불평등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때 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혼마치라고 불리는 본정(本町)으로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이 있는 충무로 일대다. 한말부터 그곳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을 위해 총독부가 얼마나 많은 예산을 아낌없이 쓰는지를 비판하면서 조선인들이 불평등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울분을 토해낸다.
1920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의 휴지통 코너에 실린 기사에서도 진고개의 도로를 다닐 때는 발이 미끄러질 정도로 도로가 잘 놓여있는 반면, 북촌의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발이 돌부리에 채기 일쑤라고 비꼰다. 거기다 전등도 없어서 온통 암흑천지라고 한탄한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사는 가난한 북촌과 이에 대비되는 일본인들이 사는 부유한 남촌이라는 구분이 생긴 것은 한말이라고 부르는 개화기부터였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 중에 <자리 짜기>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사방관을 쓴 양반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자리를 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옆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물레로 실을 뽑고 있고, 바지를 입지 않은 아들이 돌아앉아서 책을 읽는 중이다. 한눈에 봐도 경제적인 상황이 안 좋아 보이는데 따로 설명은 없었지만 한양의 진고개에 사는 몰락한 양반의 집안 모습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강남을 으뜸으로 치지만 조선 시대에 남쪽은 천대받았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의 남부 관할이었는데 명례방과 훈도방에 속하는 지역으로 남산을 등지고 있어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진고개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오가는 길이 진흙투성이라서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지 않으면 걸어서 내려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교통까지 불편해서 생활에 여유가 없는 몰락한 양반들이 모여서 사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면서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고집이 센 ‘남산골샌님’ 혹은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난다. 따라서 조선 시대 내내 남산을 중심으로 한 진고개는 변변한 시장이나 볼거리가 없는 동네이자 가난하고 자존심 강한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어버린다. 낮고 작은 초가집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가운데 과거에 연거푸 떨어진 선비가 뒤뜰에서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 남산골의 전형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술을 잘 빚는다는 명성은 누릴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속담을 통해서 당시 진고개에 사는 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쌀이 풍족해야 떡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고개가 변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이 개항한 이후였다. 청나라 사람들과 서양인들이 한양에 들어오면서 남산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앞서 설명한대로 가난한 조선인들만 살아왔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도 그들 틈에 섞여서 1882년 즈음부터 남산의 진고개 일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공사관의 관리들과 소수의 점원들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차츰 건너온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게 된다. 새로운 땅에서 기회를 얻기 위해 무작정 온 이주민부터 사업 확장을 위해 건너온 사업가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이전 이주민들이 자리를 잡은 진고개 일대에 모여든다. 그러면서 진고개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게 되었고, 문화와 풍습 역시 크게 달라진다. 물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면서 일본인들은 진고개 일대를 넘어서 남대문 쪽으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한말과 개화기 경성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중심지는 진고개였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주택의 모습이다. 처음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은 한옥을 빌리거나 구입해서 살다가 여유가 되자 일본식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수키와와 암키와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지붕이 무거운 한옥과는 달리 수키와와 암키와를 결합한 걸침기와를 쓰면서 지붕이 가벼운 일본식 주택은 외관상으로 명백하게 달랐다. 처음에는 한두 채였다가 차츰 늘어난 일본식 주택들은 진고개 일대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특히,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2층 주택들이 늘어났다.
일본인들이 진고개에 자리 잡으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상점들의 등장이다. 조선 시대에는 가난한 남산골 선비들이 사는 곳이라 시장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잡은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껴 하는 조선인들을 상대하는 여러 종류의 상점들이 들어선다. 특히 조선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우유와 과자, 커피, 사탕과 담배 같은 것들로 진고개에서 왜각시가 파는 눈깔사탕을 먹어보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 성냥과 석유, 석탄 같은 것들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상점들도 늘어났다. 거기다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과 양복을 비롯한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진고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가로 발돋움한다. 그러면서 사람 외에 우마차와 인력거, 자전거들이 오가게 되면서 1895년부터 도로를 새로 깔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깔린 도로에는 가로등과 전신주들이 자리 잡게 된다. 처음에는 석유를 사용해서 불을 밝히던 가로등은 1900년 한성 전기회사가 세워지고 전기를 공급하게 되면서 전기등으로 바뀌게 된다.
아울러, 동본원사 경성별원과 대신궁 같은 종교 시설물이 들어서는데 일본식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가파른 경사의 지붕은 진고개의 모습을 바꿔놓은 또 하나의 색다른 풍경이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명목으로 세워진 일본식 건축물들은 진고개는 물론 남산 기슭까지 빼곡하게 들어찼다. 아울러 일본식 주택과 더불어서 서양식 주택들도 지어지면서 남산 일대의 풍경은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번화한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이런 모습은 광복이 되고 1946년 혼마치가 충무로로 바뀌면서 차츰 사라져간다. 하지만 아직도 남산골과 충무로 일대에서는 당시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비롯한 통치의 흔적들을 군데군데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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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