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국악의 보폭과 진폭이 넓어지던 2000년 초반, 국악을 비롯한 공연예술계에는 음악극 열풍이 그 어느 때보다 거셌다. 2002년 의정부음악극축제가 시작되어 국내·외 작품들을 소개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2014년 ‘창작국악극대상’ 같은 수상 제도가 생기기도 했다. 연극계에서 음악극은 음악이 가미된 참신한 장르였고, 국악계에선 판소리를 비롯한 민요·정가 등 전통성악이 나아갈 또 하나의 방향이었다. 뮤지컬의 활성화도 이러한 흐름에 한몫했다.
그러면서 창작국악 진영에는 새 소재 유입의 폭과 흐름이 확장된다. 특히 창작판소리계에선 전통판소리 다섯마당의 변환이나 위인의 삶을 대상으로 했던 과거와 달리 외국문학과 희곡이 중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일종의 소재 교체의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2001년 ‘국악뮤지컬집단’을 표방하며 창단한 타루는 2008년 <시간을 파는 남자>를 정식발표하며 화제를 낳았다. 스페인의 작가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경제학자인 원작가가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을 풍자한 내용과 스토리가, 뮤지컬과 판소리 어법에 의해 훨씬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책이었기에 ‘독자’가 본 작품의 ‘관객’이 되기도 했다.
음악극의 유행과 함께 많은 단체가 극(劇)의 줄기를 이룰 이야깃거리를 탐색하기 시작한 때도 이때이다. 무엇보다 소리꾼 이자람의 본격적인 등장은 지금도 잔잔한 파격으로 다가온다. 2007년, 이자람은 <사천가>를 내놓는다. 이로 인해 창작국악의 한 장르였던 음악극(국악극)의 또 다른 물줄기인 ‘1인 창작판소리’에도 물이 차올랐다. 다른 악사와 함께했지만 1인 소리꾼의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낸 <사천가>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이 원작이다. 선행을 베풀며 살아와 신들로부터 많은 돈을 받은 여인이지만, 인간들에게 상처 입고 짓밟히면서 점차 악덕 자본가로 변해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자람이 판소리로 풀어내는 방식은 달랐다. 원작이 온갖 물음표로 수렴되는 부조리극이었다면, <사천가>는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나가며 ‘그래도 삶은 위대하다’고 긍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희곡에 전통공연예술적 요소를 곁들여 ‘또 하나의 연극’으로 선보인 작품들과 달리, 이자람은 원작(연극)을 음악‘극’이 아닌 ‘1인 창작판소리’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파격이었다. 따라서 여러 배역으로 나누어 전개되던 원작의 이야기와 그 전개는 1인 소리꾼의 입과 재담에 몽땅 맡겨졌다. 이로 인해 소리꾼(1인)만이 지닐 수 있는 ‘판소리적 전지적 시점’도 형성됐다. 따라서 배역들에 의해 조립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리꾼이 모든 것을 꿰뚫게 되고, 이야기는 물론 그것이 구연되는 장에 대한 예술적 통제권까지 갖게 됐다. 2011년, 이자람은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도 판소리 <억척가>로 풀어낸다. 외국문학이 창작판소리의 소재로 차용될 수 있다는 자신감, 희곡으로 태어난 원작이 소리꾼 특유의 1인칭 전지적 시점에 의해 재독해 되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외국문학의 판소리화는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판소리 다섯마당의 하나인 <적벽가>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중국의 <삼국지>가 판소리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래에 들어 외국문학이 창작판소리의 소재로 선택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다. 김성녀는 2012년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 후, 그리스 3대 비극의 하나인 <메디아>와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각각 2014년·2015년에 선보였다. 상기한 극단 미추의 배우로 활약하던 시절의 경험이 반영된 선택과 접근법이었다.
<사천가>와 <억척가>로 주가를 높인 이자람도 외국문학과 판소리가 만나는 장에서 젊은 기수로서의 활약을 이어나갔다. 독일 게오르크 뷔히너의 탄생 200주년인 2013년, 연출가 가보 톰파의 연극 <당통의 죽음>에서 그는 작창을 맡았다. 이후 그의 이자람의 창작 목록에는 외국문학이 자주 등장한다. 2014년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을 원작으로 창작판소리 <이방인의 노래>를 선보였다. 카페 같은 무대, 점프슈트와 운동화 차림의 이자람은 무대와 객석을 누비며 소설을 판소리로 풀어냈다. 2019년에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그의 창작판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2014년, 타루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각색해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로 선보였다. 여성 소리꾼 4명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원작에선 햄릿의 죽음을 알리는 조용한 조포 소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햄릿의 진혼제를 지내고, 망자를 천도한다. 유럽 땅에서 풀지 못한 망자의 한(恨)을 한반도에서 판소리로 풀어준 것이다.
2016년,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은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를 선보여 화제를 낳았다. 뉴욕 월가를 배경으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한 허먼 멜빌의 단편 <바틀비 이야기>가 원작이다. 소리꾼 안이호도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동명의 창작판소리로 풀어냈다.
외국문학이 창작판소리의 소재로 차용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다. 창작력을 지닌 소리꾼이나 연출가가 책으로 접한 내용을 전통적 구연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은유적 전통도 있고, 판소리를 통해 체화한 풍자력과 소설이 지닌 비판·풍자의 힘이 맞물려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외국문학의 소재적 차용이 오늘날 ‘문학의 판소리화’에도 마중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자람은 주요섭의 1925년 단편 <살인>과 1936년 작 <추물>을 1인 창작판소리로 연출했다. 브레히트에 중심을 둔 전작이 이자람식 ‘장편-판소리’라면, 두 작품은 이자람식 ‘단편-판소리’라 할 수 있겠다. 이외에 이승희는 김애란의 단편 <여보세요>를,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는 김탁환의 역사소설 <가시리>를, 지기학은 황선미의 대표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안이호는 임채묵의 단편 <야드>를 판소리로 만들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이 ‘묵독’으로 소비한 국내·외 문학들이 소리꾼의 ‘낭송’을 통해 다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판소리의 노래와 사설을 통해 우리는 문학계에 유행하는 이 시대의 낭송문화인 ‘ASMR’를 창작판소리를 통해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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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