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름
리뷰 | 서울남산국악당 [남산소리극축제] 총평
글윤단우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발행일2024.06.20
여자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나
서울남산국악당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 5월 8일~18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는 지난해부터 다양한 창작 판소리 무대를 한 자리에 모은 남산소리극축제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어린이극과 가족극 세 편을 엄선해 관객들과 만났고,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올해는 여성서사극 네 편으로 무대를 꾸몄다. 야외무대에서도 두 편의 공연이 올려져 축제의 면면이 더욱 풍성해졌다.
2024 남산소리극축제 메인 포스터 <여설뎐>
‘여성서사’라는 카테고리가 최근에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지난 몇 년간의 경향성을 볼 때 여성서사는 창작자들이 가장 뜨거운 관심을 쏟는 주제 중 하나다. 예술계에서 여성서사를 적극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ㅇㅇ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부터 연원을 찾아야 한다. 문학, 미술, 사진, 만화 등 개인 창작 장르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예술계 성폭력 고발은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고은, 이윤택, 김기덕 등 거장 예술가들이 가해자로 호명되며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고발은 가해자를 단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계에 안전한 창작 환경 만들기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고 현실의 성차별과 성폭력을 새삼 의식하게 된 창작자들은 작품 내부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성역할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가부장적 질서에 문제제기하며,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가시화하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인 이성미 시인은 이를 두고 주제와 감각이 달라졌다고 평한 바 있다. 미투 운동 이전에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여성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여성서사’는 꾸준히 존재해 왔지만 이를 채우는 내용과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고발은 가해자를 단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계에 안전한 창작 환경 만들기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고 현실의 성차별과 성폭력을 새삼 의식하게 된 창작자들은 작품 내부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성역할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가부장적 질서에 문제제기하며,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가시화하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인 이성미 시인은 이를 두고 주제와 감각이 달라졌다고 평한 바 있다. 미투 운동 이전에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여성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여성서사’는 꾸준히 존재해 왔지만 이를 채우는 내용과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를 들어라
올해 남산소리극축제 무대를 여성서사극만으로 채운 이 과감한 기획은 미투 운동 이후 이어진 이러한 예술계 변화의 흐름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편의 여성서사극을 아우르는 축제 타이틀은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로 붙여졌는데, 다종다양한 여성서사 중에서 굳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축제 무대를 꾸민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들은 모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불의에 맞서 싸운 여자들이다.
5월 8일부터 18일까지 크라운해태홀에서 진행된 메인 공연은 이화SORI의 <솔의 기억>, 창작하는 타루의 <정수정전>, 사부작당의 <청비와 쓰담 특공대>, 방탄철가방의 <배달의 신이 된 여자 - 배달순>의 네 편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솔의 기억>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나주 유지인 박대인의 딸 기옥과 그의 집안 노비의 딸 솔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기옥의 증손녀 혜진에 이르는 긴 시간대를 다룬다(공연 리플릿에는 솔을 박대인 집의 노비로 소개하고 있으나 1894년 신분제 폐지로 공식적으로는 노비가 사라진 만큼 소작인이 보다 가까운 표현으로 보인다).
자매처럼 자란 기옥과 솔은 나란히 광주여고보(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해 학생들의 독서모임인 ‘소녀회’에 가입한다. ‘소녀회’는 표면상으로는 독서모임이었지만 그 결성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토론회를 열었고 광주고보의 남학생 독서회와 공동전선을 구축해 수업 거부, 동맹휴업, 백지동맹, 모금활동 등을 벌였다. 1929년 9월에는 광주학생소비조합을 설립해 금남로 3가에 2층 집을 얻어 1층은 빵집, 2층은 문방구로 운영하며 비밀모임을 가졌다.
5월 8일부터 18일까지 크라운해태홀에서 진행된 메인 공연은 이화SORI의 <솔의 기억>, 창작하는 타루의 <정수정전>, 사부작당의 <청비와 쓰담 특공대>, 방탄철가방의 <배달의 신이 된 여자 - 배달순>의 네 편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솔의 기억>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나주 유지인 박대인의 딸 기옥과 그의 집안 노비의 딸 솔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기옥의 증손녀 혜진에 이르는 긴 시간대를 다룬다(공연 리플릿에는 솔을 박대인 집의 노비로 소개하고 있으나 1894년 신분제 폐지로 공식적으로는 노비가 사라진 만큼 소작인이 보다 가까운 표현으로 보인다).
자매처럼 자란 기옥과 솔은 나란히 광주여고보(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해 학생들의 독서모임인 ‘소녀회’에 가입한다. ‘소녀회’는 표면상으로는 독서모임이었지만 그 결성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토론회를 열었고 광주고보의 남학생 독서회와 공동전선을 구축해 수업 거부, 동맹휴업, 백지동맹, 모금활동 등을 벌였다. 1929년 9월에는 광주학생소비조합을 설립해 금남로 3가에 2층 집을 얻어 1층은 빵집, 2층은 문방구로 운영하며 비밀모임을 가졌다.
제목은 ‘솔의 기억’이지만 작품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솔의 기억이 아니라 치매로 과거의 기억을 잃어가는 기옥의 솔에 대한 기억으로 전개된다. 기옥과 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거와 기옥의 증손녀 혜진이 솔을 찾아가는 현재의 두 시간대가 교차되는데, 병렬적으로 흘러가던 이 두 개의 시간대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혜진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사진 속 솔의 얼굴을 알아보며 비로소 만나게 된다. 1929년 학생연합은 동맹휴업과 백지동맹 등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식민지 교육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고, 기옥과 솔은 현장에서 각각 체포된다. 곧 풀려난 기옥과 달리 이후 솔의 행방은 알 수 없는데, 작중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진 않지만 솔의 사진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당한 것으로 짐작된다.
무대에 오르는 22명의 출연자 전원이 여성으로, 주요 배역 외의 앙상블 배우들은 솔이 기옥에게 글을 배우는 장면에서는 몸으로 한글 자모를 표현하고 광주여고보의 소녀회가 광주고보와 광주농보와의 연합서클인 ‘ㄱ회’로 재조직될 때는 배우들의 동선으로 ㄱ 자음을 만들어내는 등 공연 장르를 신체극으로 확장한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인 시위에 나서기 전 학생들이 결의를 다지는 장면에서 무대 바닥에 흰 천을 펼쳐놓고 상부에서 붉은 조명을 쏘아 일장기를 표현한 것은 이렇다 할 무대세트를 동원하지 않고도 시각적 완성도를 높인 탁월한 연출이었다.
<정수정전>은 이 같은 군담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면서도 가정·사회·국가가 요구하는 전통적 여성 역할에서 벗어난 여성 영웅을 그려내며 여성군담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 명문가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수정은 부모가 간신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정혼자와 혼인하는 대신 남장을 하고 학문과 무예를 갈고 닦아 과거 시험에 응시해 급제한다. 북방 오랑캐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수정은 대장군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대승을 거둔다. 이에 임금은 정수정에게 큰 상을 내리고 그를 부마로 삼고자 하고, 수정은 자신이 여자임을 밝힌다. 이후 수정은 정혼자였던 장연과 혼인해 가정을 이루지만 나라에 다시 위기가 닥치자 다시금 무장을 하고 출정한다.
무대에 오르는 22명의 출연자 전원이 여성으로, 주요 배역 외의 앙상블 배우들은 솔이 기옥에게 글을 배우는 장면에서는 몸으로 한글 자모를 표현하고 광주여고보의 소녀회가 광주고보와 광주농보와의 연합서클인 ‘ㄱ회’로 재조직될 때는 배우들의 동선으로 ㄱ 자음을 만들어내는 등 공연 장르를 신체극으로 확장한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인 시위에 나서기 전 학생들이 결의를 다지는 장면에서 무대 바닥에 흰 천을 펼쳐놓고 상부에서 붉은 조명을 쏘아 일장기를 표현한 것은 이렇다 할 무대세트를 동원하지 않고도 시각적 완성도를 높인 탁월한 연출이었다.
세상을 구하러 온 여성 영웅
두 번째 공연인 창작하는 타루의 <정수정전>은 동명의 고전소설이 원작으로, 흔치 않은 여성 군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군담은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 영웅적 활약을 전개하는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이야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작품의 배경은 대개 중국이고 외적의 침입이나 간신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쟁이 등장하며, 주인공은 명문대가 출신으로 어려서 고난을 겪다 도사 등 스승을 만나 도술과 무예를 익히고,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홀연히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결말로 끝난다.<정수정전>은 이 같은 군담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면서도 가정·사회·국가가 요구하는 전통적 여성 역할에서 벗어난 여성 영웅을 그려내며 여성군담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 명문가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수정은 부모가 간신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정혼자와 혼인하는 대신 남장을 하고 학문과 무예를 갈고 닦아 과거 시험에 응시해 급제한다. 북방 오랑캐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수정은 대장군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대승을 거둔다. 이에 임금은 정수정에게 큰 상을 내리고 그를 부마로 삼고자 하고, 수정은 자신이 여자임을 밝힌다. 이후 수정은 정혼자였던 장연과 혼인해 가정을 이루지만 나라에 다시 위기가 닥치자 다시금 무장을 하고 출정한다.
창작하는 타루는 수정이 중요한 결심을 하는 순간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장면을 삽입하며 가부장제 내부의 여성 후계자라는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한편 남편 장연이 수정과 공주를 모두 부인으로 맞이하는 설정이나 원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수정과 시모의 갈등을 생략해 수정이 가부장제 속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대폭 축소해 보여준다. 또한전쟁을 지휘하는 수정이 장연의 상관으로 남편보다 우위에 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부장제의 지배적 성담론을 전복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출연진 중 가장 체구가 작은 공미연이 임금 역을, 가장 키가 큰 윤지선이 수정 역을 맡아 체형을 통해 힘의 기울기를 보여주고, 수정의 아버지 정국공 역은 송보라가, 수정의 수하 장군 한복 역은 김가을이, 수정의 유모 역은 이재현이 맡는 등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지운다. 특히 공미연은 재치 있는 입담과 코믹한 연기로 씬 스틸러로서의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다른 출연진과 달리 경기민요의 어법을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출연진 중 가장 체구가 작은 공미연이 임금 역을, 가장 키가 큰 윤지선이 수정 역을 맡아 체형을 통해 힘의 기울기를 보여주고, 수정의 아버지 정국공 역은 송보라가, 수정의 수하 장군 한복 역은 김가을이, 수정의 유모 역은 이재현이 맡는 등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지운다. 특히 공미연은 재치 있는 입담과 코믹한 연기로 씬 스틸러로서의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다른 출연진과 달리 경기민요의 어법을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린이 영웅은 바다를 지킨다
세 번째 공연 <청비와 쓰담 특공대>는 메인 공연 중에서 유일한 어린이극으로, 제주설화 영등할망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경문제를 이야기한다. 제주도 할머니 집에 놀러 온 서울 소녀 청비는 고양이 친구 호야를 통해 제주 바다가 텅 비어버리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제주의 수호신 영등할망은 일 년에 한 번 제주도를 방문해 해산물의 씨앗을 바다에 뿌려 한 해의 먹거리들이 자라도록 도움을 주는데 올해는 그 중요한 씨앗을 뿌려주지 않았단다. 이에 청비는 고양이 호야와 부산 갈매기 등과 ‘쓰담 특공대’를 조직해 깊은 바닷속 영등할망을 만나러 간다. 그러나 알고 보니 바다가 텅 비게 된 것은 영등할망이 씨앗을 뿌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 때문이었다. 청비는 자신이 가진 특별한 치유 능력으로 바다를 정화해 바다 생물이 돌아오도록 한다.
줄거리만 보면 이 이야기가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라는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여설뎐>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싸움이 무언가를 지키는 싸움임을 상기한다면 어린이 영웅이 주인공인 <청비와 쓰담 특공대> 역시 이 무대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이 이야기가 어린이극이라는 점에서 어린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환경문제를 전달하는 시도가 의미 있는 것과는 별개로 환경문제가 기성세대가 저지르고 뒷세대가 수습하는 구조임을 생각한다면 책임의 주체인 어른들은 사라지고 어린이 영웅이 세계를 구하는 식의 이야기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배달 자전거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마지막 공연인 <배달의 신이 된 여자 - 배달순>은 2014년 소리꾼 최용석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초연한 1인극 <방탄철가방-배달의 신이 된 사나이>를 젠더벤딩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최용석은 이 작품으로 제2회 창작국악극대상 남자 창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주인공 최배달이 배달순으로 이름이 바뀐 것 외에도 시민군으로 민주화투쟁에 참가하는 애경과 계엄군이 되어 시민군 진압에 나서는 지석의 관계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원작에서 애경은 배달의 짝사랑 대상이고 지석은 배달의 친구였지만 배달순이 주인공인 올해 공연에서는 애경과 달순이 친구 사이로, 지석은 달순이 짝사랑하는 오빠로 각색되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달순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5일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돕기 위해 자전거를 배운다. 그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교감선생님의 딸 애경이다. 달순은 애경과 지석 사이에서 우정과 사랑을 두고 가슴앓이를 하지만 이내 애경과 지석의 사이를 응원하며 애경의 친구로 남기로 한다. 그러나 애경은 부모님을 따라 광주로 이사를 가고, 지석은 사관학교에 진학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달순은 혼자가 된다. 광주로 가서 평양반점 배달부로 취직을 한 달순은 배달대회에서 우승하며 배달의 신으로 불리게 된다.
주인공 최배달이 배달순으로 이름이 바뀐 것 외에도 시민군으로 민주화투쟁에 참가하는 애경과 계엄군이 되어 시민군 진압에 나서는 지석의 관계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원작에서 애경은 배달의 짝사랑 대상이고 지석은 배달의 친구였지만 배달순이 주인공인 올해 공연에서는 애경과 달순이 친구 사이로, 지석은 달순이 짝사랑하는 오빠로 각색되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달순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5일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돕기 위해 자전거를 배운다. 그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교감선생님의 딸 애경이다. 달순은 애경과 지석 사이에서 우정과 사랑을 두고 가슴앓이를 하지만 이내 애경과 지석의 사이를 응원하며 애경의 친구로 남기로 한다. 그러나 애경은 부모님을 따라 광주로 이사를 가고, 지석은 사관학교에 진학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달순은 혼자가 된다. 광주로 가서 평양반점 배달부로 취직을 한 달순은 배달대회에서 우승하며 배달의 신으로 불리게 된다.
관객들이 무대를 쥐락펴락하는 달순을 따라 웃을 수 있는 장면은 달순이 배달대회에서 우승하는 순간까지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서거’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우는 달순, 시민군에 합류한 애경, 계엄군이 된 지석의 모습이 차례로 그려지며 이야기는 역사의 급류에 휘말린 개인들의 비극으로 내달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짜장면 배달에 나선 배달원들은 계엄군의 총포 앞에서 쓰러진다. 짜장면이 든 배달 철가방이 졸지에 방탄 철가방이 된 현실 앞에 망연자실해하던 달순은 계엄군의 폭거를 알리는 방송이 애경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그를 만나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이 죽기 전에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다는 말에 달순은 짜장면 300그릇을 자전거로 실어 나르며 도청의 마지막 밤을 준비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애경이 아니라 지석이다. 지석과 나누는 짜장면 한 그릇은 달순의 마지막 만찬이 된다.
90분여의 공연 내내 자전거에 배달 철가방을 싣고 홀로 무대를 누비는 정상희는 그야말로 엄청난 에너지와 무대 장악력으로 관객들을 압도했는데, 공연은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올려져 더욱 뜻깊은 무대가 되었다. 축제 전체로 보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시작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마무리되는 공연의 배치 또한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여자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 싸움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이제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다음을 생각할 때다.
90분여의 공연 내내 자전거에 배달 철가방을 싣고 홀로 무대를 누비는 정상희는 그야말로 엄청난 에너지와 무대 장악력으로 관객들을 압도했는데, 공연은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올려져 더욱 뜻깊은 무대가 되었다. 축제 전체로 보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시작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마무리되는 공연의 배치 또한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여자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 싸움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이제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다음을 생각할 때다.
글
윤단우
작가. 칼럼니스트. 인터뷰어. 공연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에 공연 리뷰를 기고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공연 큐레이션 메일링 <위클리 허시어터>를 매주 발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은 여자다』,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 『여성, 신체, 공간, 폭력』 등이 있다.
사진제공
서울남산국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