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겨울

리뷰|서울남산국악당 [젊은국악 단장] 음악_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고승희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발행일2023.11.29

가장 적극적인,
전통(판소리)의 동시대화

서울남산국악당 젊은국악 단장(음악)_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10월 28일
 
물에 잠긴 도시를 상상한다. 물기를 머금은 잿빛 하늘이 내려앉는다. 도시를 거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하늘 같은 강물이 흐르고, 이들의 다리 아래로 바다 같은 물이 차오른다. 사람들이 걷는다. 물에 잠긴 도시에서 무겁게 다리를 움직인다. 물길은 사람들을 밀어내고, 사람들은 이내 길을 잃는다. 부지불식간에 생명을 잃은 영혼들이 물거품으로 떠오르고, 그들을 위한 송가가 시작된다. 노은실의 <엠비언트 판-소리>는 ‘위로와 치유의 음악’이었다(연출‧보이스‧퍼포먼스 노은실, 사운드 퍼포머 해미 클레멘세비츠, 대금 백다솜, 오브제 아티스트 문수호 등).
노은실 ⓒ 주현우

발상의 전환으로 다시 태어난
동시대 판소리

노은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본질 안엔 ‘판소리’라는 전통의 장르가 자리하고 있지만, 예술 세계는 판소리 너머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판소리, ‘엠비언트 판-소리’다.
이 작품은 기존의 판소리에 대한 인식을 깨부수고, 그것의 정의를 다시 세운다. 판소리란 무엇일까.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음악으로 이야기를 엮는 작업이다. 무대에서 소리꾼은 심청이 되기도 하고, 심봉사가 되기도 하며, 용왕이 되기도 한다. 요즘의 판소리는 진화와 변화를 거듭했다. ‘서사’가 중심에 자리했던 판소리는 기존의 다섯 바탕을 뛰어넘어 서양의 고전, 현대 소설로 장르를 확장했다.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경을 뛰어넘는 보편적 서사를 확보하는 것이 판소리를 동시대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서다.
 
노은실은 상식을 깼다. 그는 “판소리가 가진 것을 지켜야 한다는 매너리즘을 타파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발상의 전환’은 아예 새로운 장르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은실은 스스로에 대해 “나는 판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현시대의 판소리이지, 판소리와는 ‘다른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판소리의 원형을 유추했을 때 어쩌면 지금의 형태에 가깝지 않았을까 판단했다”는 것이 이 공연의 출발이었다.
 

판소리의 구음과 시각적 장치가 어우러져

<엠비언트 판-소리>는 60분 동안 이어진다. 이 시간 동안 나온 여섯 곡은 판소리의 기존 형식과 구성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음악 공연이라 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엠비언트 판-소리>엔 서사가 사라졌다. 구구절절 주고받는 언어의 향연을 채운 것은 구음(口音)이다. 서사가 빠진 판소리는 추상의 형태였으나, 공연에서 선보인 6개의 곡은 ‘음악을 위한 음악’만은 아니었다. 6개의 곡은 각각의 스토리를 안고 있고, 공연은 놀랍도록 ‘공감각적’이다.
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공연사진 ⓒ최태연
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공연사진 ⓒ최태연
무엇보다 공연의 구성과 곡의 배치가 절묘하다. 객석으로 자리한 공연자들이 입으로 독특한 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엠비언트 판-소리>는 공연이 어떤 형태로 나아갈 것이라는 힌트를 줬다. 입으로 내는 소리의 종류가 다양했다. ‘흐으으’, ‘이아’, ‘으아’, ‘투투투투’등을 비롯해 이상하고 기이한 소리가 쌓이며 주술적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무대 위에 자리한 목각인형(퍼펫)의 두상은 마치 공연을 관장하는 신적 존재 같기도, 공연을 관람하러 온 관객의 또 다른 모습 같기도 했다. 노은실이 구상하는 판소리는 서사를 이미지로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무한한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힘

노은실이 만들어 내는 소리의 종류는 원시적이며 원초적이다. 전통 판소리의 창법이 나오면서도 몽골과 켈트 음악이 가진 과거의 소리, 자연의 소리가 어우러졌다. 각각의 작품마다 무한한 세계를 여행하게 했다.
판소리 춘향가 중 ‘적성가’ 대목을 가져온 ‘숲(Forest)’에선 ‘지리산의 풍경’이 장대하게 그려졌다. 입으로 만들어 내는 다양한 소리의 조각들이 거대한 공간을 그리며 요소요소로 자리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죽음과 개인이 마주한 죽음의 경험을 담은 ‘부유’는 무가(巫歌)적인 속성이 강했다. 떠나가는 존재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이들이 감정이 엉키며 위로와 치유의 시간을 갖게 한다. 흘러가는 물처럼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인식하고 그것이 회복의 에너지로 되돌아오길 기원하는 무대다.
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공연사진 ⓒ최태연
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공연사진 ⓒ최태연
노은실 <엠비언트 판-소리> 공연사진 ⓒ최태연
다채로운 연주와 소리의 향연으로 이어진 즉흥곡(‘프랙탈 시나위’)은 한계를 뛰어넘는 음악가들의 기량을 볼 수 있는 무대였다. 사실 이 무대엔 두 사람밖에 없다. 노은실과 기존 판소리의 고수 역할이 될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뿐이다. 두 사람은 입과 손으로 여러 악기 소리를 쌓으며 시나위의 순간을 맞았다. 노은실이 입으로 내는 대금 소리와 실제 악기 대금이 마주하는 순간들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프랙탈 시나위’는 보다 많은 악기와 음악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규모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소리의 여행을 떠난 공연은 ‘밤(Sacred Night)’로 막을 내린다. 무대 위 목각인형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이자, 하늘을 상징하는 존재로 음악과 함께 사색의 깊이를 더한다. 새하얀 별들이 촘촘히 박힌 광활한 밤하늘을 마주하는 이색적 경험을 공공의 공간인 공연장으로 이어지게 하는 곡이다. 깊고 신비한 밤하늘을 그린 음악은 관객에게 명상의 시간을 마련한다.
 

적극적인, 전통의 동시대화

공연은 판소리를 엠비언트 음악으로 풀어낸 것처럼 보이나, 노은실은 “엠비언트 음악과 판소리가 가진 본질”을 병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두 장르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사색적인 속성을 빼내 보컬리스트 노은실의 강점을 극대화해 선보이는 것이다. 서사는 빠져있지만, 작품에선 소리꾼이자 보컬리스트인 노은실이 가진 판소리와 사운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구보다 판소리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나만의 판소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음악은 자칫 주술적이고 무거울 수 있지만, 그것을 덜어준 것은 친근하게 감기는 선율의 힘이었다. 듣기 편하도록 빚은 그의 선율은 엠비언트 판소리의 생경함을 덜어줬다. 각각의 무대에서 영상과 조명, 오브제로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한 것도 관객의 상상력을 키우는 요소였다. 공연이 끝나면, 마치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공연의 시작 전후로 무대 위에 뿌려진 모래들이 결계를 치고 푸는 것만 같았다.
노은실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의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창작자다. 그의 음악 역시 ‘자기 내면’에서 출발해 서서히 세계로 걸음을 옮긴다. 개인이면서 사회 속 인간으로의 경험과 인식, 성찰이 그의 음악 안에 녹아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의 판소리(춘향가)를 재창조하고, 전통 장르의 주체가 되는 소리만을 떼어내 다양한 시도를 이뤄낸 것은 전통예술 창작자의 가장 큰 성취다. 그 어떤 장르보다도 적극적인 ‘전통의 동시대화’가 이 무대에서 시작됐다.
고승희
현재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로 재직 중이다. 전통예술과 클래식 음악, 연극, 무용, 대중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소식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는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제공 서울남산국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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