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중구는 도심 안에 제조산업이 밀집된 지역으로 특히 충무로와 을지로는 지역성과 로컬 연결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곳이다. 일명 ‘삼발이’로 불리는 삼륜 오토바이가 각자의 인쇄 공정 전문성을 가진 업체들을 돌아다니며 이들을 하나로 연결한다.
충무로역 주변 작은 골목에 있는 디자인점빵의 사장인 박철성 씨는 인쇄소를 운영했던 아버지와 디자인을 공부한 형의 영향으로 2004년 충무로 인쇄골목에 입성했다. 그가 대학생이었던 때에도 인쇄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양산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인쇄’라는 큰 틀 안에서 사업체마다 특화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오래갈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박철성 씨는 사람들이 인쇄 기법에 친숙해지면 자연스레 인쇄업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인쇄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쉽게 접할 만한 곳이 부족했고, 이들이 커뮤니티와 작은 연대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그들을 위한 수업을 시작했다. 공방 안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인쇄를 배우고 점점 많은 사람이 디자인점빵을 찾게 되었다. 배움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학교’라고 칭해보았다. 이렇게 충무로인쇄학교는 변화하는 인쇄 산업에 발맞추어 생겨났다.
충무로인쇄학교 초반에는 원데이 클래스 위주로 수업했는데, 문득 인연을 너무 쉽게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오랜 인연을 맺을 수 있는데 시간의 한계로 인해 쉽게 끝나는 인연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충무로인쇄학교를 위한 일은 원데이 클래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현재는 7주 동안 자신의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작가, 디자이너 등 관련 업종에 종사하거나 지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고 그림책을 만들고 자신의 작품을 판매한다.
현재 세운상가 일대를 재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1968년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로 완공돼 전자산업의 메카로 떠올랐던 세운상가가 1980년대 이후 서울이 개발되고 용산전자상가가 건설됨에 따라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전면 철거한 후 재개발로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것이다. 서울시는 이 사업들 중 하나로 2018년부터 ‘다시·세운 인쇄기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역사와 기술을 자랑하는 을지로와 충무로인쇄골목에서 창조적 미래 인쇄 산업을 이끌어갈 청년 인쇄업자들을 양성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인쇄골목 전통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찾아오는 인쇄·디자인의 혁신 공간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임대료가 높아짐에 따라 인쇄업에 종사하는 세입자들은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결국 하나의 구역이 사라지는 것은 지금 인쇄골목의 장점인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충무로에는 30,40년 정도 오랜 기간 인쇄업에 종사하신 분들이 많다. 재개발 이후 장소를 이전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예 문을 닫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나의 산업에서 장비 라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를 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손편지를 좋아하고,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지금도 사람들은 종이를 좋아한다. 요즈음은 고객 수요가 세분화되어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시스템이 더욱 유리해져 이러한 특성에 따라 잘 대응하면 인쇄의 미래가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충무로인쇄학교도 머지않은 미래에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꿈꾼다. 이곳에서 주력하는 레터프레스는 활자를 찍어내는 전통 인쇄 기법이고, 리소그래피도 200년 이상 된 오랜 기법이다. 이를 전통과 연결해 체험과 전시가 있는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책 만들기 체험을 하거나 전통적인 콘텐츠를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인쇄학교의 힘은 사람이 모이는 데서 나온다. 모임을 통해 관계성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지역 연결성까지 이어진다. 올해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 확장할 계획이었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타이밍이 맞지 않았지만 앞으로 20,30명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플리마켓을 열거나 전시를 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어떤 산업이든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모두 중요하다. 우리가 융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 강조되는 시대이지만 이때 제대로 된 로우테크를 한다면 단순한 제조업이나 기술이 아닌 예술의 영역에 이를 수 있다. 50여 년 뒤에는 이른바 장인이 될 것이다. 한때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도 시간이 흐르며 함께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전통 안에서 기틀을 잡고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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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