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기획공연

국악 생존기

시간을 달리는 국악

글_이소영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는 악명높은 감옥에 갇힌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등장한다. 천장에는 탈출구가 있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다가 마지막 점프에서 추락했던 상황. 브루스 웨인은 몸에 밧줄을 묶고 수없이 점프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 역시 매번 마지막 점프에서 실패하고 만다. 그를 한참 지켜보던 감옥의 늙은 의사는 ‘오래 전 이 감옥을 탈출했던 단 한 명의 아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전해준 탈출의 비결은 생명을 보장하던 안전끈을 풀고 도약하는 것이었다.

 

인생의 막다른 길 앞에 선 사람에게는 실수할 여유가 없다. 그는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결정적인 액션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절실함을 가져야 한다. 닿을 수 없는 희망을 향해 있는 힘껏 도약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이야기. 어쩌면 모든 생존기는 각박한 현실의 끝에서 시작되는 억센 판타지가 아닐까.

 

남산골기획공연 <국악 생존기> 포스터


서울남산국악당은 지난 4월 7일(목)부터 기획공연 <국악 생존기>를 진행하고 있다.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말 국악. 실로 국악은 살아있다. 박물관이 아닌 공연장에서, 역사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말이다. 고요하게 흘러온 것 같지만 살아있기 위해 부단히 고군분투했을 우리 시대 국악의 이야기를 흥겹지만 진지하게 꺼내본다. 박제당하지 않고 ‘살아있기 위해’ 우리음악은 무엇을 버리고 또 취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시간을 달리는 국악

대한민국 최초의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1985년, 서양악기와 우리악기를 함께 사용하여 새로운 국악을 연주한 최초의 실내악단 ‘슬기둥’이 있다. 10여 년 전, 창작음악계의 풀타임 아티스트를 자처하고 나선 ‘소나기 프로젝트’도 있다. 장르를 뛰어넘으며 실험적+대중적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 밴드 ‘잠비나이’도 있다. 이들은 4월 24일(일)에 열리는 <국악 생존기 – 시간을 달리는 국악>에 참여하는 창작 뮤지션들이다. 각 팀이 활동해온 시간을 연결해보면 대한민국 창작국악이 달려온 처음과 나중이 온전히 이어진다. 

 

그렇게 향유했던 시대도, 음악의 느낌도 저마다 다른 세 팀이지만 이들에게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다. ① 각각의 아티스트들이 국악이라는 장르로 음악을 배웠고, ② 창작을 했고, ③ 국악은 고루하다는 편견에 갇히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이다. 

 

 

 

잘 할 수 있는 악기로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 : 잠비나이

3인조 창작밴드 ‘잠비나이’ (왼쪽부터 심은용, 이일우, 김보미)

 

‘잠비나이’는 홍대 레이블마켓에서 공연을 시작한 창작 밴드다. 이후 홍대를 거점으로 국내와 해외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실험적인 음악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마니아적인 음악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2012년부터 꾸준히 대중과의 스킨십을 시도해 왔고, 그러는 동안 보이지 않게 ‘잠비나이’의 등을 밀어준 ‘해외진출’이라는 흐름과 언론의 관심이 있었다. GMC 레코드의 김형군 대표는 ‘잠비나이’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악기로, 하고 싶은 음악을 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대중이 거기에서 보편성을 찾아주었다”고 한다. 

 

완전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상 뒤로 물러날 곳도 없어진 ‘잠비나이’는 지금, 생존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완전히 떴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여전히 국악이라는 장르가 가져다주는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잠비나이’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음악은 음악이고 국악은 국악이다? : 소나기 프로젝트

장재효 대표가 이끄는 ‘소나기 프로젝트’

 

‘소나기 프로젝트’의 장재효 대표는 음악을 할 때 국악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국악과 음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변화하는 뮤지션들에 비해 음악을 판단하는 주체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 이런 것들이 창작을 하며 겪은 어려움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그는 과감하게 생계를 보장해주는 레슨과 그밖에 ‘투잡’을 포기했다. 오직 창작음악으로 먹고 사는 풀타임 아티스트가 더 많아지길 바랬고, 본인 스스로 그 하나에만 집중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어떻게 먹고 살라고 그러냐”는 걱정과 못마땅한 목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럴수록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음이 맞는 아티스트들과 새로운 작업을 했고, 다양한 프로젝트와 실험무대를 만들어 관객과 소통하려고 했다. 그의 목표는 ‘음악은 음악이고 국악은 국악이라는 편견’이 사라지도록 끊임없이 창작하고, 연주하는 일이다.  

 

 

 

시간 흐르고 사람 변해도, 정신은 그대로 : 슬기둥

올해로 데뷔 31년차를 맞은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슬기둥’의 고민은 ‘보존을 넘어 수익성이 있는 국악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각 단원들의 생활이 보장되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음악적으로 새로운 시도와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그렇게 버티며 올해로 31년차 중견 국악단체가 되었다. ‘슬기둥’의 이준호 대표는 “그동안 단원들은 많이 바뀌었지만, 슬기둥의 정신은 그대로”라고 말한다. 우리 음악이 가진 전통 장단과 선법, 그 안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의지 말이다. 

 

서양 음악을 비롯해 새롭고 독특한 장르들이 많이 들어왔고, 슬기둥의 음악이 그러한 트렌드에서 조금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 안에서 슬기둥이 붙잡고 가는 사명은 ‘변하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는 메카로 남는 것’이다. 누군가는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새로운 장르로까지 뻗어나가야 하고, 누군가는 묵묵하게 지켜야 할 것들을 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후된 것을 끌고 가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슬기둥’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조차도, 그들에게는 잠재적으로 발전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이준호 대표의 생각이다.  

 

 

 

부활을 꿈꾸는 판 – 니나노 길놀이

 “판의 부활 – 니나노 길놀이”에 참여하는 연희단 ‘청배’

 

<시간을 달리는 국악>이 있기 하루 전인 23일(토)에는 젊은 연희 단체들이 남산골한옥마을 야외무대로 모인다. 무려 “판의 부활”이라는 제목을 앞세웠다. 죽었던 몸에 숨이 들어가고 싸늘했던 얼굴에 온기가 도는 기적. 그 옛날, 마을의 온 주민과 함께 어울렸던 연희판의 공감과 신명의 무대를 꿈꾸었다. <판의 부활 – 니나노 길놀이>에는 청배 연희단, 연희집단 The 광대, Creative Group 노니, 여성 연희단 노리꽃, 유희 컴퍼니 등 젊은 연희 단체들이 대거 출연한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연희꾼들이 만드는 새로운 길놀이. 판을 시작하는 것은 연희꾼이지만, 판을 완성하는 쪽은 그 시작에 반응하는 시민들이리라.

 

이미 지나갔지만 의미있는 공연들도 있다. 7일(목) 저녁에 진행된 <창작 방정식 – x 찾기>와 8일(금) 저녁에 열렸던 <작창의 시대 – 시대의 노래 찾기> 그리고 10일(일)에 있었던 세월호 2주기 콘서트 <다시, 봄> 등.  창작국악팀 ‘그림(The林)’, ‘숨[su:m]’, ‘고래야’가 처음으로 관객과 호흡했고, 이어 소리 중심의 무대를 꾸며준 ‘국악뮤지컬집단 타루’, ‘아나야’, ‘正歌앙상블 SOUL지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냈다.

 

세월호 1주기 콘서트 <다시, 봄> 포스터

 

 

<다시, 봄>에서는 2015년 세월호 1주기 앨범을 발매한 ‘다시, 봄 프로젝트’와 ‘뮤지션 유니온’ 및 다섯 개의 국악팀이 모여 장장 5시간의 릴레이 콘서트를 펼쳤다. <다시, 봄>은 각 뮤지션들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국악이 시대와 함께 가고 있음을 노래하고 꿈꾸는 콘서트였다.



 

다크 나이트, 그리고 라이즈

밧줄을 풀고 도약한 브루스 웨인은 과연 감옥을 탈출했을까? 물론이다. 그는 배트맨이고,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그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앞에는 싸워야 할 악당 베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극복해야 하는 내면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생존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지키고 자신을 찾아가는 역전의 드라마다. 

 

때로는 생계를(혹은 생계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과감히 멈추고 음악에 몰두했던 팀, 자신들의 색을 찾아 오랜 시간 굳어져 온 국악의 벽을 뛰어 넘은 이들.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생존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와 공존하는 방법을 궁리하기까지 한다. 더딜지라도 꾸준하게 걸어가자며, 독식도 도태도 아닌 저마다의 색과 향기 그대로 함께 가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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