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레퍼토리
평롱[平弄] : 그 평안한 떨림
불온한 서울은 평안하라
글_이소영
우리 각 사람이 어느쪽에 서 있었건간에,
그동안 서울은 마냥 평안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울살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울이 지닌 양면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화려해보이는 빌딩숲 사이에는 불안하고 허기진 사람들의 하루가 흘러가고, 유구한 역사의 흔적 위로는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땀이 스며있다. 얼핏 차가워 보이지만 속에는 뜨거운 아픔이 있고, 진한 화장 뒤에는 수줍은 미소도 더러 발견되는 곳. 서울은 생각보다 사연이 많고 아름다운 곳이다.
작년과 올해,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과 시위를 보고 겪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느쪽에 서 있었건간에, 그동안 서울은 마냥 평안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자리에서 작은 소원을 담아 국악이라는 음악을 준비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남산골레퍼토리, <평롱[平弄] : 그 평안한 떨림>이다.
'아침을 여는 노래'에서는 무대 뒤로 종묘의 모습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600년 전,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가 되고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의 터는 종묘다.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왕실의 제례 문화를 보여 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 종묘에서 행하던 제례와 제례악도 마찬가지. <평롱>의 시작은 나라의 근간이자 위엄의 상징이었던 종묘제례악을 재구성한 '아침을 여는 노래'다. 화려함보다는 근엄함과 조화로움을 더욱 추구했던 종묘가 그랬던 것처럼 '아침을 여는 노래' 역시 영혼과 인간, 자연의 조우를 북과 장구 그리고 전 출연진의 목소리로 웅장하게 표현했다. 어두운 시대에도 매일 새로운 태양이 뜨는 것처럼, '아침을 여는 노래' 또한 만물을 깨우는 하늘의 빛과, 나라의 평안을 비는 사람의 마음을 그려내고자 했다.
어두운 시대에도 매일 새로운 태양이 뜨는 것처럼,
그렇게 아침이 찾아오면
우리의 하루도 새롭게 시작된다
서울의 일상,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하루가 그려져 있다.
그렇게 아침이 찾아오면 우리의 하루도 새롭게 시작된다. 멀리서 보면 사람의 인생 같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보면 단순한 하루의 여정일 수도 있는 주제들. '나는 걷는다', '나는 그립다', '나는 방황한다', '나는 소망한다' 그리고 ‘나는 사랑한다’.
'나는 걷는다'에서는 서울경기지역의 민요인 '긴아리랑'을 가져와 가야금, 거문고, 소리북, 꽹과리, 민요와 함께 재구성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걷고 걷는 사람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 뒷면에는 서울의 거리들이 실감나는 영상으로 펼쳐진다. 원거리에서 근거리로, 밤에서 낮으로. 그 위로 음악이 걷고 노래가 달린다.
궁중무용 '춘앵무'의 퍼포먼스 영상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달님 높이 올라 비춰주세요.
우리남편 오시는 길 불편함 없도록 밝게 비추어주세요.
이어서 나오는 노래 '정읍사'다. 장사를 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달님에게 남편의 오는 길을 밝게 비춰달라고 비는 여인의 노래. 그 마음을 대금과 해금, 피리, 장구, 징으로 표현하여 '나는 그립다'가 탄생했다. 노래는 생각처럼 멜랑콜리하지 않다. 연주자는 "그것이 과거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서이고, 그 정서를 표현했던 음악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즐거우나 지나치게 들뜨지 않고, 슬퍼하나 비통해하지 않는 것.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음을 아는 것이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음악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영상은 빛과 음악의 시너지를 극대화시킨다.
이어지는 네 번째 테마는 '방황'으로, 곡명은 '우키시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던 해, 일본에 잡혀있던 조선인 포로들은 우키시마라는 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게 된다. 부푼 희망을 안고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을 향해 가던 길. 그러나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고, 그로인해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거나 실종된다. 삶은 커녕 죽음의 주인도 되지 못한 사람들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영원한 방황을 시작한다.
작년, <평롱>이 서울남산국악당의 상설공연으로 올려졌을 때에는 세월호 사건이 온 국민의 마음을 차가운 바다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던 시기였다. 그리고 올해에는 시리아 난민 아이 크루디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와 터키 해안가에서 발견된 일도 있었다. 서글프게도, 우키시마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이자 현실인 것 같다.
2014년 <평롱[平弄] : 그 평안한 떨림> 공연 장면
연주자들은 음악을 연주하며 다만 "방황이 지나갈 줄 알고 그 안에서 깨어 있는 것. 깨어서 살피는 일이 우리의 일이면 좋겠노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어서 ‘소망’의 노래를 부른다. “알리오 알리오 있고, 내 맘을 알리오 있고”. 아리랑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반복구와 강원도 지역의 아리랑을 테마로 한 음악이다. 범패, 판소리, 합창의 목소리는 무속선율, 사물놀이와 어우러져 인간의 염원과 소망을 표현한다. 음악의 중간에는 특이하게도 스페인의 플라멩고가 연상되는 손박수가 들어가는데, 이는 실제로 연주팀인 정가악회가 스페인의 음악가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이루는 과정에서 음악적으로 수용한 부분이라고 한다.
공연기간 국악당 로비에서는 소원지를 작성하는 코너가 마련된다.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간직한 소원과 바람을 적어보는 시간이다. 소원이 적힌 소원지는 로비에 마련된 나무에 걸리고, 남산골한옥마을 정월대보름 행사에서 타올라 하늘로 올려진다.
칠흑같은 밤도 멀리서 보면 점이다.
이 땅에서 겪는 수많은 어둠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천재현 예술감독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첨단의 도시 서울에서 만나는 깊은 전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북두칠성 일곱 분께 답답하고 딱하여 안타깝고 억울한 사연을 하나 아룁니다.
그리던 사람을 만났는데 정담도 채 못하고 날이 밝으니 이를 어쩝니까
그리던 임을 만났는데, 임과 함께 할 수 있는 밤이 너무 짧아 샛별이 뜨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 여섯 번째 테마 ‘나는 사랑한다’에서는 여창가곡 평롱의 가사와 선율을 재구성하여 여인의 소박한 사랑과 소망을 노래한다. 무심한 듯 담담하게 선율을 그리는 해금, 그리고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 스쳐가는 기타 선율은 조명의 빛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할 곡은 ‘다시 별에게 이르는 길’이다. 종묘제례악과 함께 열었던 아침은 어느덧 기울어 별에게까지 이어지는 밤이 된다. 모든 연주자들은 자신의 악기로 독주를 선보이고, 점차적으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며 강렬하고 희망찬 피날레를 장식한다. 영상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서울의 밤거리를 보여주다가, 점점 하늘로 올라가 우주의 빛으로 담아낸다. 이 땅에서 겪는 수많은 어둠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지구에 머물렀던 음악은 높은 하늘로 돌아가 눈부신 빛이 된다.
북두칠성이 빛나는 밤,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
옛날 사람들은 밤하늘에 뜬 별을 보며 길을 찾았다고 한다. 북극성을 따라가면 북쪽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았고, 북두칠성을 천체 기상을 관장하는 신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인생의 길을 묻기도 했다. 그때에도 저 많은 별들은 일정한 자리에서 일정한 모양으로 움직이며, 평안하게 반짝거렸을 것이다.
천재현 예술감독은 "평안한 떨림은 만들 수 있는 행위라기보다는 느끼는 마음의 일일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지금은 "멀어 보이는 정치도, 한치 앞의 내 삶에도 평안을 불러 보고픈 시절"이다. 그 와중에 "우리 음악이 있어서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불안했고, 때로는 '불온하느라' 피곤했던 서울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길을 잃어 떠도는 마음들에게 우리 음악이 별이 되어 주면 좋겠다. 그 바람을 <평롱[平弄] : 그 평안한 떨림>에 실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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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