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남산골기획공연 - 국악, 시대를 말하다

템페스트

글_이은혜

<템페스트> 공연 앞부분. 폭풍을 일으키는 질지왕(프로스페로)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배우들이 무대로 나와 앉기 시작합니다. 배우들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관객들을 등진 채 양반다리를 하고 숨을 고르지요. 이때 전해지던 긴장감이란!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있거나, 함께 온 사람과의 수다 삼매경에 빠진 관객들마저 고요하게 만들었답니다. 마치 공연보기에 적합한 호흡과 자세를 만드는 준비운동같은 시간이었어요.​

 

비장한 시작, 태풍과 함께 몰려오는 우리음악과 춤

천을 이용한 안무를 통해 폭풍에 난파되는 배를 표현하는 배우들 

 

 

이윽고 질지왕(프로스페로)의 북소리가 시작됩니다. '둥둥둥둥' 힘있고 거침없는 북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면서 하나의 폭풍을 일으키지요. 이 북소리에 맞춰 배우들도 군무를 추기 시작해요. 우리의 살풀이를 연상시키기도 했던 춤은 힘찬 북소리와 남자 배우들의 굵은(?) 몸짓을 만나 색다른 멋을 냈어요. 왠지 모르게 중독성 있는 비장한 오프닝이었답니다.^^ 템페스트의 치명적인 매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폭풍이 끝나자 화재가 시작된 배의 상황

 

셰익스피어의 원작 <템페스트>에 의하면, 이 장면은 프로스페로가 자신을 왕좌에서 쫓아낸 원수들의 배를 난파시키는 장면이에요. 어린 딸과 함께 강제로 유배를 당한지 12년, 어느날 프로스페로는 자신의 무인도 앞을 지나가는 원수 일행의 배를 발견하게 되지요. 평생의 한을 풀 기회가 왔으니,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12년간 갈고 닦은 주술을 사용해 커다란 태풍을 일으킨거지요.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잠깐, 오태석 연출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들과 이름이 달라요. 모든 캐릭터는 한국의 이야기꾸러미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기의 인물들로 대체되었답니다. 아래 나오는 인물관계도를 보시고 이야기를 이어갈까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속 캐릭터와 오태석 연출의 연극 <템페스트> 속 인물 관계도 

    

귀여운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유쾌한 템페스트

섬에 살고 있는 동물들 

물론 오프닝은 이렇게 비장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캐릭터나 대사들은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질지왕의 딸 아지라든지, 아지와 사랑에 빠지는 원수국의 세자라든지. 그 외에 질지왕의 무인도 생활을 수발하는 섬의 동물들과 하인들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다 독특하고 사랑스럽답니다.

자유를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질지왕(프로스페로)의 시종


재미있었던 것은, 섬에 살고 있는 하인들이 주인인 질지왕에게 아첨하거나 기죽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나쁜 것은 나쁘다고 책망하고,자유를 달라고 대들고, 심하게는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답니다. '저게 지금 하인이야, 적이야, 뭐야?' 싶을 정도로 말이죠. 질지왕도 거기에 발끈해서 하인들은 처단하기보다는 '흥, 지껄여라~'하면서 콧방귀를 끼는 정도였어요. 자꾸 보면 서로가 다 친구같은(?) 느낌도 든답니다. 솔직하고 순수한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하고, 속이 뻥 뚫리기도 했어요.

자비왕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소지(질지왕의 동생)와 겸지(자비왕의 동생) 

 

반면 자비왕(원수국의 왕)의 신하들은 앞에서는 왕에게 아첨하고 점잔 떨지만, 뒤에서는 왕을 죽이려고 하지요. 자신들이 왕좌를 얻기 위해서 말이에요.

    

 

원한과 화해, 사랑과 용서

 

섬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질지왕의 딸 아지와(우), 자비왕의 아들 세자(좌)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질지왕은 12년 전 자신을 배신하고 무인도로 쫓아낸 동생과, 그 일에 동조한 자비왕의 배를 난파시키지요. 그런데 인연이란 게 참 희안해요. 질지왕의 딸 아지와 자비왕의 아들 세자가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물론 질지왕도 딸애가 15살이 된 것을 알고 짝을 찾아주려 했지만 말이에요. 관객들 입장에서 볼 때는 원수와 사돈을 맺어야 하는 꼴이잖아요.

혼인을 올리는 세자와 아지 

 

그래도 미움보다 강한 건 사랑인가봐요. 아지와 세자는 진실한 사랑으로 혼인을 올리고, 질지왕도 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합니다. 아들이 죽은 줄 알았던 자비왕도, 세자와 함께 나타난 며느리 아지를 어여쁘게 생각하고요.

 

쌍두아(캘리번)에게 자유를 주기로 한 질지왕(프로스페로)

 

갈등의 해소는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납니다. 질지왕은 딸이 남편을 얻고 원수와 화해하는 과정에서 섬의 모든 종들을 풀어주는데요. 그중에는 특별히 질지왕에게 많이 대들던 하인 쌍두아(캘리번)가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한 몸통에 머리가 두개 달린 쌍두아는 질지왕의 주술로 인해 두 명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섬의 동물들과 질지왕의 시종들이 쌍두아를 두 명의 인간으로 만들고자 톱질을 하고 있다 

 

깜짝 놀라며 질지왕에게 연달아 감사의 인사를 하는 쌍두아를 보며, 우리에게 당연한 저 자유가 그에게는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리던 순간이었을까, 생각했어요. 질지왕과 쌍두아는 가장 많이 투닥거리기도 했지만, 결국 가장 큰 선물을 주고받은 사이가 된 거지요.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화해의 장면들이 참 감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태석 연출과의 대화

매주 토요일에는 공연이 끝난 후 오태석 연출가와의 대화시간을 갖고 있는데요. 공연 전, 관객들이 연극과 오태석 연출님에 대해 궁금한 점을 포스트잍에 적어주셨고, 진행하시는 기획 PD님께서 몇 개의 질문을 뽑아 선생님께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맨발로 무대에 올라선 오태석 연출님! 처음에는 조용하고 말수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시더라고요!

 

여러 질문 중에 “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선택하셨느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여기에 대한 오태석 선생님의 답변을 옮겨볼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연극 하는 사람이 만나기가 힘든 분이에요. 너무 많은 학자들이 그를 신비스럽게까지 만들어서 높은 곳에 있는 작품처럼 만들어놨고. 등장인물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 등장인인물에게 하나하나 갖춰서 옷이며 장신구를 입히려면 시간과 재력이 굉장히 요구가 돼요. 그렇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국립극단이나 시립 극단같이, 재정적인 염려에서 자유로운 극단들이 해야 하는데,그 극단들은 그 극단대로 1년간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우리가 잘 접하지 못했어요.

하긴 해야죠. 대단한 양반인데 그냥 지나갈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하기로 했는데, 서구식으로 그렇게 갖춰서 하는 것은 우선 조금 낯설고 소외감을 가질 수 있어요. 친숙할 수가 없단 말이죠. (중략) 셰익스피어는 그당시 이야기 잘하는 할아버지. 그의 작품도 450년 전 런던에 시장에 장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만든 얘기에요. 그게 재미있고 능숙하기 때문에 450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하고 바꿀 수 없는 극작가로 평가 받는 거죠. 이런 분을 남의 옷을 입고 머리에 염색을 하고 서양 사람처럼 꾸며가지고서는 우리가 친숙할 수 없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사랑방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할 경우에 관객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쪽으로(삼국유사의 배경으로) 가지고 오기로 했습니다.”

 

 

힘들면 기다려. 그럼 바람불어온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배우들 


질지왕(프로스페로) 역할을 맡은 송영광 배우님의 대사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한마디 다짐해두자. 바람과 비, 이슬은 니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 가르쳐줘. 힘들면 기다려. 그럼 바람불어온다.”

살아있는 것들은 자라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대개 아픔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동생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은 질지왕(프로스페로)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절망과 분노를 겪어야 했을 거예요.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절망을 통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 사랑과 용서로까지 성장했답니다. 

 

애석하게도, 남은 인생동안 시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인생의 커다란 순리 안에서 그게 끝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가야할 방향, 마침내 닿아야 할 결국은 태풍 너머에 있지 않을까요?

세계가 사랑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빌어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마음, 연출가 오태석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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