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이재화의 거문고산조
이재화 예인(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보유자)
소리 너머에서 재현되는 음악의 표정
절묘하게 얽힌 가락과 장단이 오감을 넘어선 ‘육감’의 감각으로 청자를 이끌 때, 참을 수 없어 마침내 내지르게 되는 탄성. 바로 ‘추임새’다. 필연적으로 솔직함을 담보할 수밖에 없는 ‘추임새’가 초봄의 어느 날,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거문고 연주자 이재화를 만난 순간. 대화의 리듬 사이로 새겨지는 ‘추임새’에 맞춰, 산조의 진양 장단처럼 시작된 그의 음악 이야기는 한 시간 동안 격정적인 호흡으로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침내, 뜨거운 말의 향연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서 그는 서늘한 성찰만을 남긴 채, 홀연히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다시 거문고 술대를 움켜쥐었다.
울고 웃고 이토록 와 닿는 노래
남산골한옥마을 민씨가옥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이재화 명인
그렇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재화’다. 그리고 이재화의 ‘산조’다. 단언컨대, 산조(散調)는 감정의 놀이다. 그러나 산조의 결론은 늘 평정심에서 머문다. 이재화는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 일컬어지던 거문고로, ‘감정’을 연주한다. 그의 ‘감정’은 산조는 물론, 민요 반주와 창작곡 영역에서 늘 일관된 좌표가 돼 왔다. 하지만 결코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이란 이름으로 굽이치는 감정의 파도를 거문고에 직접 싣지는 않는다. 그는 먼저, 육성으로 산조 가락과 민요 가락을 노래한다. ‘구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노래’는 ‘연주’이자, ‘음악’ 그 자체이다. 때문에 우리 음악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꼽는 ‘성음 치레’가 그는 노래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언제부턴가 연주자들이 무조건 악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아요. 하지만, 우선 성음 치레를 해야 해요. 말하자면, 발효된 소리를 찾으란 얘기죠. 김치 빨리 익혀 먹고 싶다고 난로에 올려놓으면 되나요? 음악도 무르익는 데 시간이 필요해요. 발효 과정이 필요한 거죠. 헌데, 이 발효되는 과정은 악기로만 찾기 어려워요. 노래가 수반될 때, 음악이 가는 길을 더 빨리 찾을 수 있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할 소리
음악 여정에서 그에게, 앞선 발자국을 만들어 준 이가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였던 스승 한갑득. 말 수는 적었지만, 음악을 들려주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던 스승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제자의 가락을 어루만졌다.
“19년 동안 선생님 밑에서 소리를 다듬었어요. 제가 듣기에 제 소리가 맞지 않으니까. 소리는 소리로 받아가야 해요. 선생님이 지적하지 않으셔도 선생님 음악과 제 음악이 겹쳐지지 않으면, 스스로 ‘이건 아니다’라고 판단했던 거죠.”
묵직하고 깊은 한수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 거문고가 아니던가.
듣는 이의 마음을 툭 치고 지나가는 소리를 얻기 위해 그는 용맹정진했다.
물러서서 전진한다
성장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그 성장 뒤에는 전형을 거부함으로써 얻는 창조가 수반된다. 전통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기보다, 이제 이재화는 ‘나’의 소리를 갈망한다. ‘나의 음악’, ‘나의 소리’. 선비들의 악기로 칭송받던 거문고에 산조 가락을 얹었던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 백낙준도 경험했을 그 갈급함을, 이재화도 똑같이 경험하는 중이다.
“연주자가 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결국 ‘작곡’입니다. 연주도 창조의 한 영역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내 소리, 내 음악이 하고 싶어요. ‘사진 소리’가 아니라 진정한 저의 음악이 간절합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의식구조와 생활환경이 변한,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지금의 음악. 이재화가 그리는 나의 음악은 그래서 남다르다.
“어떨 때는 저도 모르게 새로운 가락이 나와요. 지금은 특정한 틀에 매어 있는 것이 싫습니다. 제 음악을 만들고 싶고, 그래서 작곡을 하고 있어요. ‘신(新)산조’라는 음악도 곧 나올 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온고지신을 행동에 옮길 거예요. 저는 저니까요.”
‘구전심수’, ‘이심전심’의 힘
2014 <예인, 한옥에 들다> 공연장면
이재화가 생각하는 오늘 공연의 목적은 단순하다. 관객과의 이심전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소리는 그가 이제껏 거문고를 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교감이 안 되면,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만나 할 일이 뭐가 있어요. 음악을 들으시는 분들과 진실된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에요. 어쩌면 이것도 욕심일 수 있죠. 욕심을 내려놓고, 제가 해 온대로, 하는 대로 연주할 생각입니다. 욕심 부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은 가르침’은 역시 마음으로 입증될 수밖에.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마음의 나눔이란 이번 공연에 국한된 일회적 만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공연에 오시는 분들이라면 정말 우리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들일 겁니다. 연주자로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음악도 모국어와 같아서 언제나 배우고 일상에서 익히셨으면 하는 거예요. 우리음악이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사실 음악도 배우지 않고서는 깊이 있게 감상하기가 어렵거든요.”
진정한 의미의 교감을 원하는 이재화에게 우리는 오늘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과거의 질문, 오늘의 대답
“지금도 음 하나 때문에 고민하고 삽니다. 연주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음악에 깃든 정신. 그 정신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가 관건인 것 같아요. 우리 음악 자체가 대단한 음악인데 연주력이 못 받쳐주는 것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탄탄한 기본기가 없이는 우리음악의 질적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유성기음반 속 명인들의 가락을 세상에 불러내고, 옛 소리들의 미덕을 추억하면서 이재화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 음악의 ‘느낌’.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곡선’의 미려함과 ‘호흡’의 편안함이 그에겐 아직도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아련하기만 하다.
연주자로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여자 거문고 연주자 중에 제가 첫 세대나 다름없습니다. 예전에 전수생 신청을 하러 갔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안 받아 준적도 있었죠. 사실, 최근까지도 이런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힘든 적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용기’는 제가 놓칠 수 없었던 노력 가운데 하나였죠.”
온전한 가락은 인생의 나이테와 비례한다. ‘싸랭’ 소리 한 번에 천둥 번개를 불러들이는 거문고 연주가 자연의 소리와 감성이 합쳐져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심금(心琴)’을 울린다면, 오늘 오신 벗님네들! 주저함 없이 우렁찬 ‘추임새’ 한 번 외쳐 보시길.
사진_남산골한옥마을 / 글_김산효(국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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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