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김광숙의 서도소리
김광숙 예인(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살면서, 단 한 번도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보지 않았다. 열여섯. 처음 소리를 시작한 이후 그에게 미래는 오직 ‘좋은 소리’를 얻는 ‘순간’이었을 뿐. 페이스를 조절하는 마라토너처럼, 40년 넘는 시간 동안 호흡을 고르며 그는 천천히 밝게 빛나는 별이 되기만을 꿈꿔 왔다. 그럼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기만 하다. 몸담고 있던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에서, 정년을 맞은 지도 어느 덧 넉 달이 지나고 있다. “잘 살았다”라는 단순 명쾌한 정의를 남긴 지난 세월 앞에서 소리꾼은 요즘 새롭게 ‘현재’를 생각한다. 다시 출발점에 선 그의 꿈이 그 옛날, 소리를 처음 시작했던 시절을 발판으로, 남모르게 찰랑대고 있는 것이다. 한옥에 들어선, 예인 김광숙. 그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고, 여전히 힘차게 뛰고 있는 중이다.
지속가능한, 부정(否定)
김광숙 명인
가끔, 긍정과 부정이 같은 권리를 가지고 적용되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현실에서는 인정되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부정되는 이율배반적인 경우다. 소리꾼 김광숙은 이 같을 도전을 스승 오복녀에게서 경험했다. 기계적이라 할 만큼, 치밀하고 촘촘하게 소리를 엮어 나가던 스승은 제자 김광숙에게 “아니야. 아니야”를 연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었다. 지금의 제자의 소리는 인정하면서도,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고백하건대 김광숙은 그 말의 진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리의 행로. 소리꾼의 태도
그렇다면, 한 사람의 소리꾼은 어떻게 단련되는 것일까. 갈채와 찬사는 내 몫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연륜이 차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잘했다는 다독거림에 고개를 주억거렸던 김광숙에게도 분명 수련의 시기는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담금질의 아픔을 주었던 길고 더디기만 한 시간과의 싸움을 끝내고, 그는 ‘수심가’ 한 곡으로 치열했던 지난날을 보상 받고 있다.
“‘수심가’만 15년을 하고 나니까, 어느 날 ‘아! 정말 명곡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노래를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헌데, 그때 부터 이상하게 소리가 안 되는 거예요. 어떤 느낌인줄은 알겠는데, 이상하게 노래가 마음대로 안 돼. 소리의 맛을 아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표현하는 것도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요.”
그의 말에 기대어 유추해보건대, 한 사람의 소리꾼이 겪는 학습 과정은 시간에 대처하는 소리꾼의 자세에 달려 있는 듯하다.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수심가’의 맛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김광숙은 이런 이유 때문에 ‘태도’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는다.
소리는 어떻게 쌓여 가는가
“소리를 익히는 데에는 순서가 있어요. 단계별로 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너무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소리는 그래선 안 돼요. 10단계가 있다고 가정할 때, 3단계 정도 와서 ‘이제 이 정도면 되겠지’하는 속단을 하기 쉬워요. 분명, 그 다음이 있는데 말이죠.” 당장은 가 닿을 수 없지만, 분명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마음속에는, 당초 꺼지지 않는 심지 하나가 타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라는 스승 오복녀의 음성이 귓전을 맴돌 때마다 그는 오래 오래 소리길을 가고 싶었고, 그랬기에 더욱 더 갈 길은 멀기만 했다.
‘나’를 누르고, ‘우리’를 끄집어내는 서도소리 이쯤에서 의문 하나. 이번 공연에서 그는 어떤 소리를 펼쳐 보일 것인가. 우직하게 간직해 온, 결 고운 소리는 분명 소리꾼의 바람을 담고 있을 터. 공연을 앞둔 김광숙은 벌써부터 기대에 찬 음성으로, 공연장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다. “우선은 제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들에 대한 기대가 커요. 어디 명인이라는데 ‘잘하나 한 번 보자’라는 관찰자의 입장으로 한 걸음 떨어져 계시기보단, 제가 전하는 소리 속에 담겨 있는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느껴주셨으면 해요. 어떤 분은 화가 난 상태로, 또 어떤 분은 아주 기분이 좋은 마음으로 소리를 들으실 수 있겠지요. 그 순간만큼은 함께 하시는 분들의 마음과 제 소리가 은근히 포개지는 느낌이 들면 좋을 것 같아요.”
깨달음에 관한 소리의 시(詩)
소리를 듣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속 깊은 친구의 은밀한 매력은 오래, 그리고 자주 만나는 데에서 알 수 있는 법. “삶에서 우러나온 소리가 바로 서도 소리”임을 강조하는 김광숙은 이 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서도에 ‘수심가’가 있다면, 남도에는 ‘육자배기’가 있어요. ‘육자배기’는 굉장히 애통해하는 소리입니다. 애절하다 못해 그것을 뛰어 넘은 ‘통곡’이지요. 그런데 서도소리는 이렇게 절통하지 않아요. ‘애절하다’, ‘애잔하다’ 하는 표현이 적합한 ‘애환’을 느낄 수 있는 소리죠. 그래서 소리를 들었을 때 그렇게 슬프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어요. 슬픔이 있음에도 꿋꿋함과 씩씩함이 내재돼 있어서 입니다. 그런데 이런 속마음은 단번에 잘 알기 어렵잖아요? 색깔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혼합된 색깔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듯해요. 노란 색이라도 그 속에 갈색도 있고 연두색, 밝은 하얀색도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파스텔 톤의 색깔이라고나 할까요. 혼합된 색과 비슷하기 때문에, 즉물적으로 느끼기 어렵지만, 그게 또 서도소리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늘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뜨거울 수 있다면, 그것이 서도소리가 갖고 있는 묘미라는 해석이다. 소리 안에서 울고 있는 슬픔의 바람에 요동치지 않고, 깔깔대며 출렁이는 기쁨의 파도 역시 평정심으로 잠재우는 것. 바로 이 점 때문에 소리 없이 깊어지는 소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두터워지고, 노련한 소리꾼일수록 그가 부르는 소리에서 우리는 담담하고 편안한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다.
당당하게, 참으로 당당하게
30대 중반을 넘어서던 무렵, 김광숙은 숨어 있던 ‘피양(평양)’ 기생들을 찾아다녔다. 이유는 단 하나. 강단 있고 야무지게 관객을 직시하던, 예전 소리꾼들의 기개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손들의 앞날을 걱정해 소리를 접은 평양 기생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그 짱짱한 기백만큼은 여전했다. “요즘 너희가 하는 소리가, 소리가?”라며 일갈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김광숙은 진짜 소리를 고민하며 되돌아와야 했다. 지금의 북한 지역이 고향인 ‘서도 소리’는 과거, 소리꾼들에게 호령하듯 압도하는 도도한 태도를 요구했다. 김광숙은 이런 옛 소리꾼들을 가리켜, “객석을 내려다보듯 소리를 했다”며, 그 칼칼한 서도소리의 맛을 재현해 내고 싶다는 포부를 전한다.
“청청한 청에 감히 누구도 말도 못 붙이게 하는 소리였어요. 자신감과 당당한 태도가 구현될 때, 서도소리의 참 맛이 나올 수 있는데, 저는 그 동안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산천을 흔들었다’던 평양 기생들의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소리를 직접 해 보고 싶습니다.”
“다소곳하면, 서도 소리의 맛이 제대로 발휘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는 이제 ‘하늘이 내린 소리’를 찾아,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남산골한옥마을 민씨 가옥에서 소리 벗님들과 마음을 열고 만날 것을 약속한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글_김산효(국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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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