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서울남산국악당 기획공연 총평
좋은 공연을 만드는 거푸집, 서울남산국악당
글_송현민
기획력이 생명이다. 국악계는 이러한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이를 실행하는 기관과 단체는 극히 드물다.
그런 점에서 서울남산국악당만의 내실 있는 기획력으로 빚은 2016년의 공연들이 눈에 띄나보다.
| 2016 <예인, 한옥에 들다> 오늘의 예인으로 참여한 박송희 명창
먼저, ‘장소 특정성’ 공연이다.
2014년에 시작하여 2016년에 3회를 맞이한 <예인, 한옥에 들다> 시리즈는 1895년에 지어진 관훈동 민씨 가옥, 즉 전통한옥에서 진행되는 공연이다.
확성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주의 공연’으로 자리 매김한 이 시리즈는 명인들이 출연하는 <오늘의 예인>과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대학생들이 오르는 <내일의 예인>으로 나눠 진행된다. 2016년 <오늘의 예인>에는 박송희(판소리/5.6), 지성자(가야금/5.18), 안옥선(가야금/6.3)이 출연했다.
이 공연은 과거에 음악을 ‘연주’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느끼게 했고, 이 과정을 통해 전통음악이 추구해야 할 음향 환경에 대한 반성과 시사점을 제공했다.
|2016 <예인, 한옥에 들다> 오늘의 예인으로 출연한 지성자 명인과 김청만 명인
국립국악원의 우면당과 풍류사랑방, 돈화문국악당과 같이 자연 음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수정되고 있는데, 이것은 자연음향의 진귀함과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에 <예인, 한옥에 들다>와 같은 한옥 음악회가 큰 역할을 했다. 천재현(남산골한옥마을 예술감독)의 <렉처콘서트:마음을 듣는 음악-풍류>(10.14)도 이러한 성격이 잘 녹아든 공연이었다.
| 2016 <남도음악이 맥 - 이태백> 공연장면
다음은 ‘예인(명인)’ 중심의 공연이다. 사람이 곧 음악인 법. 이름난 예인은 공연의 질을 보장한다. 그래서 다수의 공연장이 예인을 ‘모시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별도의 기획력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울남산국악당은 달랐다. 제4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국악부문 최우수작을 수상한 <남도음악의 맥-이태백>(9.3~4)은 한명의 예인을 형성한 스승과 지음(知音)의 존재를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예인 이태백의 음악적 세계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2016년 <예인, 한옥에 들다> 내일의 예인 참가자들
2016년, 서울남산국악당은 다음 세대를 위한 씨뿌리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예인 한옥에 들다> 중 <내일의 예인>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신진 음악가 15인의 성장을 위한 귀한 판이었다.
국악 공부에 뼈와 살이 되건만,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발표의 장이 제한·위축되고 있는 산조를 멘토(=예인)의 반주로 한바탕(전곡)을 발표할 수 있었던 이 장은 이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2016년 <가객열전> 대학전 공연장면 (한양대학교 가단)
서울남산국악당의 차세대 양성은 현재 국·공·시립 공연장 및 단체와 비교했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시 만드는 판의 소리>는 경합의 과정부터 순위 결정까지 모든 것을 관객과 함께 하는 축제 같은 경연의 장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2015년 첫 회부터 큰 호응을 얻어 2016년에도 이어진 <다시 만드는 판의 소리>(5.24/531)와 이 형식을 롤모델 삼아 가곡분야에 적용한 <가객열전>(8.23/9.6)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메커니즘을 적극 도입한 공연으로 서울남산국악당과 젊은 국악인들 사이에 ‘히트작’이 되었다. 이 공연은 심사도 청중 평가단의 투표와 내부 심사자 두 명의 점수로 진행되었다.
| <다시 만드는 판의 소리> 문파전에서 정권진 문파를 대표한 윤진철 명창
<다시 만드는 판의 소리>는 ‘문파전’과 ‘대학전’으로 진행되었다.
문파전은 일가를 이룬 명창들의 추천 하에 문파(門派)를 대표하는 소리꾼 4인이 경연을 펼쳤고, 판소리 대학전은 서울대·이화여대·중앙대·한국예술종합학교·한양대를 대표하는 판소리 전공자 5인이 겨룬 장이었다.
오늘날,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길은 제각각이다. 어릴 때부터 이름을 날린 소리꾼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며 부지런히 공부를 일 삼는 독공의 수행자도 있다. 이 후자의 노력은 그의 지인 혹은 스승만이 아는 법이다. 그래서 문파전이 의미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제 스스로 숨은 소리꾼들을 스승 명창들이 명예를 걸고 추천했고, 관객은 숨은 소리꾼을 만날 수 있었다.
| <가객열전> 대학전 공연이 끝난 후, 참가자들의 모습
<다시 만드는 판의 소리>의 성공에 힙 입어 2016년에 첫 선을 보인 것이 <가객열전>이다.
명창과 명고수의 만남처럼 가객 역시 그 반주를 맡은 앙상블을 잘 만나야 한다. 서울남산국악당 측은 가객 외에 가야금·거문고·대금·피리·해금 등으로 구성된 가단(歌團)의 중요성을 진행과정부터 강조했고, 신진 가객들은 자신의 지음 찾기부터 연습과 성장, 평가단에 의한 최종 선정까지 이 모두를 남산국악당에서 값지게 경험할 수 있었다.
| <가객열전> 대학전에서 최고 가단으로 선정된 한예종 가단. 최고 가단 특전으로 2017년 2월 7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공연 <지금>을 올렸다.
국악계에는 유력 일간지나 국·공·시립 기관이 주최하는 대회가 많다. 여기에 비할 때, 서울남산국악당이 이들에게 베푸는 ‘혜택’은 상대적으로 약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에 박힌 경연대회보다 참가자들의 자율성이 돋보였으며, 관제(官制)와 뒷거래가 야합한 경연대회가 아닌 경합(競合)의 건강성이 살아 숨 쉬던 공연으로 자리 매김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국악계에서 두 공연을 통해 ‘매진’이라는 소문도 들었고.
| <국악 생존기> 에서 선보인 젊은 연희단체들의 합동 공연 "니나노 길놀이" 출연자들
서울남산국악당은 2016년에 다종다양한 예술가와 그룹을 모아 국악계에 시사성을 제공하는 장을 펼치기도 했다. 14개 단체가 출연하여 국악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공유했던 <국악 생존기>(4.7~24), 6개 연희단이 참가한 <젊은 연희 주간>(7.30~9.30), 특색 있는 4개의 그룹이 참가했던 <남산 초이스>(11.24~12.18)가 여기에 속한다.
장르와 세대별로 여러 공연들을 한 자리에 모아 각 장르의 특수성과 정체성, 그리고 각 세대의 특징을 만날 수 있었다.
| 현대음악 시리즈 <RITUALS>와 <카산드라> 공연장면
국악의 외연 넓히기 작업은 2016년에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오늘날 국악이 국경과 장르를 넘어 횡단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장착하고 우리 앞에 놓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인도의 시타르 연주자 우스타드 우스만 칸이 함께 한 <한옥에서 전하는 인도풍류-시타르>(10.15), 프리뮤직의 거장 강태환의 <걸리지 않는 바람, 나팔풍류-알토색소폰>(10.16)을 통하여 콜라보레이션의 상대자로 각광 받는 인도명상음악과 프리뮤직을 만날 수 있었고, 앞서 말했던 장소 특정성 공간을 활용한 음악회로도 손색이 없었다.
<남산골기획공연X현대음악시리즈>로 진행된 아시안아트 앙상블의 <RITUALS>(6.15)와 <카산드라>(10.12~13)를 통해 독일을 중심으로 서양 현대음악과 국악작곡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정일련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은 ‘국악이 넘어야 할 산’이 아니라 ‘국악이 가야할 또 다른 길’을 암시하는 기획 공연이었다.
| 2016 서울남산국악당 레퍼토리 공연 <평롱: 그 평안한 떨림> 무대장면
남산국악당의 2016년 기획공연들을 앞서 제시한 키워드-장소특정성, 예인(명인), 차세대 양성, 축제 같은 경합, 국악계에 시사성 제공, 국악의 외연 넓히기 등-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2016년, 아니 그 이전부터 지켜봐온 남산국악당은 다른 국악 공연장과 차별화된 기획력의 엔진을 부단히 돌리고 있다.
기획은 공연을 만드는 거푸집을 빚는 행위이다. 서울남산국악당이 큰 변화를 선보이기 시작한 2014년부터 만들어온 기획물들이 지속·발전하며 국악 전문가 및 일반 대중과 끊임없이 만나기를 바란다.
한 예로, 위에서 거론한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한 공연들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공연’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젊은 음악가들이 ‘나아갈 길’이 지워지는 것과도 같다. 길이 있어야 걸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또 걸어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래서 이러한 기획물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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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수정: 2021.02.11 적용